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고 헤이하치로 (문단 편집) == 일화 == [[파일:external/www.yuko2ch.net/1286084062731.jpg|width=350]] 해군 사관 예복을 입고, [[황태자]] 신분으로 육군 및 해군 [[대령|대좌]]이던 시절의 [[쇼와 덴노]]와 함께 찍은 사진.[* 쇼와 덴노의 키는 165cm로 당대 일본인의 평균 신장보다 다소 큰 편이었다.] 도고는 몇 안 되는 '''[[참군인|진짜 군인]]'''으로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. 뤼순 요새를 봉쇄하다가 [[후지급 전함]] 야시마와 [[시키시마급 전함]] 하츠세가 [[기뢰]]에 접촉하는 바람에 폭침되는 대참사 후에 함장들이 보고하러 와서 눈치만 살피자 오히려 따스하게 격려를 했다거나, 발트 함대 격파 이후에는 부상당하고 [[포로]]가 된 [[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]] 제독에게 직접 문병을 가는 등, 부하나 패자에게 너그러웠다. 이런 고매한 인품과 행동으로 생전에 전 일본 국민으로부터 추앙받았다. || [[파일:external/meiji.sakanouenokumo.jp/togo.jpg|width=200]] || || 1933년 사진(86세) || 그러나 정작 퇴역 이후에는 지나치게 주변에서 추앙한 탓인지 여러 가지로 독선적인 인물이 되었고, 결국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불황기와 [[워싱턴 해군 군축조약]] 체결 시기에 이르러서는 일본 해군의 체질 개선을 가로막은 원흉이 되고 말았다. 당장 12인치 포를 12문 탑재한 [[카와치급]]이 [[드레드노트급]]이 되지 못한 것은 적어도 주포 중 일부는 적함보다 강력한 것을 달아야 한다고 주장한 도고 헤이하치로의 실책이 컸다. 덕분에 카와치급은 12인치 45구경장과 12인치 50구경장 포를 혼용하는 바람에 [[일제사격]]과 [[협차]]같은 드레드노트급 전함이 사용하는 함포사격술을 사용할 수 없었다. 그래서 일본은 영국에서 기술을 수입할 목적으로 [[콩고급 순양전함]]을 도입하게 된다. 문제는 [[쓰시마 해전]]에서 드레드노트급 전함이 탄생하는 계기를 만들어낸 제독이 도고 헤이하치로라는 것이며, 따라서 동일인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실책이었다. 게다가 본인이 의도한 결과야 아니었겠지만, 해군 복제 개선을 막음으로서 일본 해군 장교들이 당시 미 해군 [[근무복]]을 참고해 만든, 목이 꽉 조여 시대에 뒤떨어지고 불편한 1종 군장(동근무복 겸 동정복)을 입고 싸우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. 1920년대에 해군 장교 동계 피복을 당시의 영국 및 미국처럼 목이 트인 더블 버튼에 [[셔츠]]와 [[넥타이]]를 안에 착용하는 보다 국제표준에 가까운 것으로 바꾸자는 의견이 나왔을 때, 도고에게 의견을 묻자 도고는 딱 잘라서 "이 옷은 쓰시마 해전 승리의 정수다."라는 말로 반대 의견을 밝혀 무산시켰다. 위 히로히토와 함께 찍은 사진 속에서 입은 동예복은 그나마 타국 해군의 피복과 유사한 형태다.[* 사실 영국식 해군 정복보다는 [[독일 제국 해군]] 예복과 더 비슷하다.] [[노기 마레스케|노기 장군]] 사후, 그의 뒤를 이어 히로히토의 [[황태자]] 전담 [[교사]]를 맡았는데, 히로히토는 노기 장군을 훌륭한 스승으로 여겼으나 도고 제독은 박하게 평했다고 한다. 장남 도고 효는 군대에 가지 않고[* 딱히 징병을 기피한 건 아니고, 메이지 정부 시절엔 징병제 도입 초기라 징집 제외 대상이 매우 많았는데, 집안의 장남 역시 징병 대상에서 제외됐었다.] 관료로 살다가 1969년에 사망, 차남 도고 미노루 제독은 해군 장교가 되어 소장까지 진급, [[태평양 전쟁]]을 겪고 1962년에 죽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